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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 Miller Band (스티브 밀러 밴드)

CSD 2011. 4. 17. 22:25

Steve Miller Band (스티브 밀러 밴드)



스티브 밀러가 출생한 곳은 위스콘신이지만 어릴 때 가족과 함께 남서부로 이주했다. 그가 십대에 접어들 무렵은 로큰롤 음악이 팝음악계에 막 등장한 시기였는데 그는 곧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척 베리(Chuck Berry)같은 로큰롤 선구자들의 영향에 빠졌다. 그는 특히 빌 도겟(Bill Doggett)의 음악을 좋아했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빌 도겟 밴드의 기타리스트 이름조차 모르면서 도겟 음악의 기타 연주에 황홀해 했었노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는 도겟의 1956년도 히트 연주곡 'Honky Tonk'를 들으며 기타를 익혔다. 열두살 때는 마크스멘 콤보(Marksmen Combo)라는 첫 그룹을 조직했는데 이 밴드의 기타리스트는 보즈 스캑스(Boz Scaggs)였다. 이 그룹이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노래는 'Honky Tonk'였다.

고등학교 때는 싱어가 네 명이나 되는 아델스(Ardelles)라는 밴드에서 활동했다. 이 그룹은 텍사스 및 인근 지역에 있는 학교의 교내 행사나 조그만 클럽, 댄스 파티 등에서 주로 연주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보즈 스캑스와 함께 매디슨에 있는 위스콘신 주립대학에 입학했다. 그와 보즈는 패블러스 나잇 트레인즈(Fabulous Night Trains)라는 그룹을 조직하여 중서부 대학가에서 상당히 잘 나갔다. 대학을 마친 뒤에는 덴마크의 코펜하겐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잠시 음악 활동이 정지됐다. 덴마크에서 1년여 간 문학을 공부하던 그는 자신의 갈 길이 아니라고 느껴져 1964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시카고에 정착했다. 어쨌든 그가 해둔 문학 공부는 팝음악 작사가로서 성공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1960년대 초중반 시카고에서 그는 블루스 클럽들과 레코딩 스튜디오들을 돌아다니며 당대 시카고의 명 블루스 음악인들로부터 테크닉을 전수 받았다. 몇몇 그룹에서 악단원 생활을 하던 끝에 1960년대 중반에는 배리 골드버그(Barry Goldberg)와 함께 독자적인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하던 중 샌프란시스코의 히피 록 문화의 발현을 접하고는 1966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베이 에이리어로 옮겨온 밀러는 스티브 밀러 블루스 밴드(Steve Miller Blues Band)를 만들었다. 록 페스티벌과 클럽, 회관, 그리고 새로 개관한 빌 그레이엄(Bill Graham)의 필모어 클럽 등에서 공연을 하며 스티브 밀러 블루스 밴드는 그 지역의 팬들로부터 명성을 얻어나갔다. 필모어 클럽에서 연주해줬던 척 베리 공연은 Mercury 레코드사에서 녹음하여 1967년 11월 [Chuck Berry At The Fillmore Auditorium]이라는 타이틀로 앨범이 나오기도 했다. 1967년 8월 스티브 밀러 블루스 밴드는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등의 신진 세력이 출연한 전설적인 몬트레이 팝 페스티벌에 다른 여러 젊은 록 음악인들과 함께 참가했다. 스티브 밀러 블루스 밴드는 재니스 조플린이나 지미 헨드릭스처럼 커다란 주목은 얻지 못했지만 대단한 환호를 받았다. 어느 비평가는 이들의 음악에 대해 느낀 자신의 감정을 '마구 흔들린 두꺼운 강철판과 같았다'고 표현한바 있다.

몬트레이 팝 페스티벌에 참가한 직후 스티브 밀러 블루스 밴드는 Capitol 레코드사와 계약이 체결됐다. 1968년 초에 나온 이들의 데뷔 앨범 [Children Of The Future]는 호평을 얻었다. 1968년 가을에 나온 두 번째 앨범 [Sailor]는 예술적, 상업적으로 동시에 성공을 거뒀다. 이 앨범은 연말 결산 차트 20위권 내에 들었고 싱글 'Living In The USA'도 히트를 했다. 전미 투어를 도는 사이 밴드는 이름을 스티브 밀러 밴드로 바꿨다.

60년대 말까지 밴드 멤버들의 변동이 잦았지만 공연이나 레코드의 질이 저하되지는 않았다. 스티브 밀러 밴드는 수퍼 그룹의 지위를 맴돌았지만 1970년대 초까지는 획기적인 약진을 거두지 못했다. 이들은 1969년에도 [Brave New World And Your Saving Grace] 앨범으로 앨범 차트에 올랐다. 이 앨범은 1970년 중반에는 차트 5위까지 오르는 큰 성공을 거뒀다. 1971년 가을에 나온 [Rock Live]는 여러달 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다. 이 당시의 그룹 멤버들로는 베이스 기타를 맡은 로스 밸로리(Ross Vallory), 드럼을 맡은 잭 킹(Jack King)이 있었다.

1972년에서 73년에는 밀러, 직 킹과 베이시스트 제랄드 존슨(Gerald Johnson: 前 Sweet Inspiration 출신), 올갠 주자 딕키 톰슨(Dickey Thompson)으로 재구성됐다. 1972년 초 그룹은 유럽 6개국 순회 공연을 가졌는데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그 해 1월 뉴욕 로체스터에서 당한 교통사고 때 입었던 부상으로 순회공연 중에도 고통에 시달리던 밀러는 3월에 목골절 진단을 받았는데 간염까지 겹쳐 72년 후반기에는 조용히 쉬어야했다.병고에 시달리긴 했지만 그래도 밀러에게 있어 72년은 행운의 해였다. 이 해에는 앨범이 두 장이나 히트를 했는데 [Recall To Beginning... A Journey To Eden]과 아홉 번째 앨범 [The Joker](1973)는 그의 음악 인생에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1974년 1월 중순에는 이 앨범의 타이틀곡 'The Joker'가 캐쉬 박스, 레코드 월드, 빌보드에서 모두 1위에 올랐다. 앨범 역시 골드를 기록하며 앨범 차트 1위까지 올라갔다. 밀러는 기타 플레이어紙 기자에게 'The Joker'의 히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노래는 2분 30초짜리 길이니까 라디오 유행곡 프로그램에서도 틀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항상 싱글곡을 만들고 싶어했죠. 난 싱글을 좋아해요... 그래서 2분 30초짜리 괜찮은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작업에 착수했지요. 그 일은 꼭 게임 같았어요. 십자낱말풀이 같은 거 말입니다."

그러나 성공은 반드시 행복까지 동반해오는 것은 아닌 법이어서 밀러는 금전 문제와 여자 친구와의 실연으로 괴로워하던 끝에 밴드를 해체하고 오레곤 주 메드포드에 있는 한 농장에 칩거해 동면생활을 해나가다가 1976년 초 다시 음악계 복귀를 준비했다. 베이시스트로 로니 터너(Lonnie Turner)를, 드러머로 개리 말러버(Gary Mallaber)를 끌어와 1976년 5월 [Fly Like An Eagle]을 내놓았다. 일시적인 휴업은 유익했던지 앨범은 플래티넘을 따냈고 'Take The Money And Run', 'Rock'n'Me', 타이틀곡인 'Fly Like An Eagle' 등 세 곡이 10위권 안에 들었다. 그 중 'Rock'n'Me'는 1976년 11월 6일자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랐다.

'Fly Like An Eagle'은 다음해 3월 2위까지 올랐다. 밀러는 작곡뿐만 아니라 프로듀스도 했다. [Fly Like An Eagle]을 녹음하면서 밀러는 플래티넘을 기록하게 되는 [Book Of Dreams]앨범 작업도 함께 했다. 이 두 장의 앨범은 1970년대 후반 훌륭한 록음악으로 손꼽혀지게 된다. 전작 앨범처럼 [Book Of Dreams]도 'Jet Airliner', 'Jungle Love', 'Swingtown' 등 세 곡의 Top 10 히트곡을 배출했다. 스티브 밀러 밴드의 멤버로는 터너와 말러버 외에도 하모니카 주자인 노튼 버팔로(Norton Buffalo), 기타리스트 데이빗 데니(David Denny), 그렉 더글라스(Greg Douglas), 키보디스트 바이런 올레드(Byron Allred)가 있었다.

록계 정상의 위치에 올라있는 상황이었던 1978년, 밀러는 또 다시 은둔 생활에 들어갔는데 이 해에는 히트곡 모음집인 [Steve Miller Band's Greatest Hits 1974-1978]가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차트에 올라있었다. 다시 4년간을 은둔한 뒤인 1981년, 그는 동면에서 깨어나 열 한 번째 앨범인 [The Gold Circle Of Love]를 내놓았다. 이 앨범은 전작들 만큼의 성적을 거두지 못하여 그의 긴 공백기가 치명적이지 않았냐는 견해까지 나왔다. 그러나 다음 해 그는 [Abracadabra] 앨범으로 당당하게 복귀했다. 플래티넘을 기록한 이 앨범은 게리 말러버와 공동 프로듀스를 했는데 1982년 9월 4일자 빌보드 차트에서 타이틀곡 'Abracadabra'가 정상에 올랐다. 앨범의 대부분의 수록곡들은 밴드 멤버들과 함께 쓴 곡들이지만 'Abracadabra'는 밀러 혼자서 만든 노래였다.

그럼에도 그는 앨범 성공의 공을 밴드의 노력으로 돌렸다. [The Billboard Book Of Number one Hits]라는 책에 프레드 브론슨이 적은 바에 따르면 밀러는 '그 앨범은 기본적으로는 드러머인 개리 말러버와 신참 멤버인 기타리스트 케니 루이스(Kenny Lewis), 존 마사로(John Massaro)의 창의력의 발현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1984년 후반에 나온 후속 앨범 [Italian X-rays]는 1985년 차트에 진입했으나 전작만큼의 성적은 거두지 못했고 팬들의 성원도 줄었다. 1986년 10 월 Capitol에서는 [Living In The 20th Century]를 발매했다. 1986~87년 순회공연시의 스티브 밀러 밴드 멤버는 루이스, 버팔로, 올레드, 말러버였다. 스티브 밀러는 지금도 꾸준히 활동을 계속 해나가고 있다.